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국의 자치권 이양 (문단 편집) == 아일랜드 == [include(틀:영국-아일랜드 관계 관련 문서)]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xc4Tp0-TDAk)]}}} || || 아일랜드는 왜 둘로 갈라졌는가? || [[1830년]]에 다니엘 오코넬이라고 하는 [[아일랜드]] [[정치인]]이 [[폐지협회]]라는 아일랜드 [[민족주의]] 정당을 창당한 후,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연합왕국]] 수립의 근거가 된 [[https://www.legislation.gov.uk/aip/Geo3/40/38|1800년 연합법]]을 [[https://www.libraryireland.com/Atlas/LXXXIV-Loyal-National-Repeal-Association.php|폐지]]하여 [[아일랜드 왕국]]을 부활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1870년에는 아이작 버트라는 아일랜드 정치인[* [[https://web.archive.org/web/20040710104503/http://dspace.dial.pipex.com/town/terrace/adw03/peel/ireland/butt.htm|주로 하는 일]]은 변호사였는데 생계 문제로 겸직을 하여 의정활동을 많이 하지 못하는 등의 이유로 당 내 영향력이 그렇게 높지 않았다. 아이작 버트는 연방주의자였기 때문에 아일랜드가 고도의 자치권을 갖되 영국에 남기를 원했다.]이 [[https://www.britannica.com/topic/Home-Government-Association|자치정부 위원회]]라는 단체를 만들었고 이후 자치동맹으로 재편된 뒤 1874년 총선에서 60명의 의원이 당선된 뒤 아일랜드 의회당(IPP)이 되었다.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총리가 [[https://archive.org/stream/whathomerulemean00dubliala#page/59/mode/1up|1886년 아일랜드 정부법]]을 상정했으나 자유당 연합주의자들의 반대로 [[https://www.parliament.uk/about/living-heritage/evolutionofparliament/legislativescrutiny/parliamentandireland/overview/two-home-rule-bills/|93표가 빠져나가서]] 찬성 313표 반대 343표로 부결되었다. 글래드스턴 4기 내각에서 1893년 아일랜드 정부법이 하원 통과되었지만 상원 부결되었다.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 총리 재임기에는 1914년 아일랜드 정부법이 [[https://www.parliament.uk/about/living-heritage/evolutionofparliament/legislativescrutiny/parliamentandireland/collections/home-rule-1914/gov-of-ireland-act-1914/|상정]]되었으나,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연기법을 통과시켜 자치권 이양을 연기했다. 이 과정에서 아일랜드 공화국 형제단을 중심으로 1916년에 [[부활절 봉기]]가 일어났고 영국이 주동자를 처형하고 주동자가 아닌 [[신 페인]]을 의심하는 바람에 아일랜드 독립 여론에 불을 질렀다. 그 결과 1918년 총선에서 [[신 페인]]이 아일랜드 의석 대부분을 쓸면서 독립선언을 하고 아일랜드 독립전쟁으로 이어진다. 1920년에 영국은 북아일랜드와 남아일랜드를 분할하여 자치권을 주는 [[https://www.legislation.gov.uk/ukpga/Geo5/10-11/67/contents|1920년 아일랜드 정부법]]을 통과시켰다. 남아일랜드는 영국-아일랜드 조약, [[아일랜드 내전]]으로 [[아일랜드 자유국]]으로 사실상 독립한 뒤 [[아일랜드]]로 국호를 고쳤고 [[북아일랜드]]는 영국에 남았다. 아일랜드의 자치권 논의는 영국 정치사에 있어서 거대한 나비효과를 불러왔는데 그 이유는 아일랜드의 자치권 논의를 보고 역차별을 느낀 스코틀랜드의 일부 정치인들이 1894년에 자치 위원회를 세워 자치권 이양을 촉구하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20세기 만큼 자치운동이 적극적이지 않았다. 이를 두고 아이리시 타임즈가 [[https://www.irishtimes.com/culture/scotland-not-so-brave-in-push-for-home-rule-1.103101|스코틀랜드의 자치운동은 아일랜드보다 적극적이지 않았다]]라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이 작은 몸부림이 2차 세계대전 후 두 번의 자치권 이양 주민 투표를 거쳐 자치정부와 의회를 받았지만 자치운동으로 인해 조금씩 살아나고 있었던 스코틀랜드 민족주의가 사라지지 않아서 오늘날의 스코틀랜드 독립운동으로 이어진다. 웨일스 또한 스코틀랜드와 비슷한 시기에 자치권을 이양 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